파일은 북한의 버마 폭탄 공격 이후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남북 회담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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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은 북한의 버마 폭탄 공격 이후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남북 회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통일부가 제공한 사진. 1985년 평양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측 지학순 주교(오른쪽)가 여동생과 만나고 있는 모습.

통일부가 제공한 사진. 1985년 평양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에서 남측 지학순 주교(오른쪽)가 여동생과 만나고 있는 모습.

통일부는 1983년 북한의 버마 공습 이후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남북 스포츠 및 인도적 협력에 관한 회담을 조명한 최근 기밀 해제 문서를 화요일 공개했다.

파일에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 문제부터 남측 수재민들에 대한 대북 구호품 전달 문제, 1차 적십자 회담까지 1980년대 남북회담 기록이 담겨 있다. – 적지 않은 이산가족의 만남.. 한국전쟁(1950-1953)과 서울과 평양의 예술단체 상호 공연.

1982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수단에 기초한 남북통일을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비현실적인 비전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한국은 북한과 대화를 제안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983년 10월 북한이 현재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에 폭탄 공격을 가한 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동남아시아 국가를 방문하는 동안 한국의 고위 관리 17명이 북한을 비난하는 공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북한은 이번 공격이 한국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관련 조사 결과 배후에 북한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버마는 북한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실추된 이미지 개선과 외교적 고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4년 1월 갑자기 한미 3자 회담을 제의했다.

북한의 제안에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불가침 선언 채택이 포함됐다. 남측은 대화 재개를 위해 남북이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해 3월 남측 체육위원회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해 북한에 3차 체육회담을 제안했지만 무산됐다.

1984년 9월, 한국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쌀, 시멘트, 의약품을 보내겠다는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일에는 정부가 당초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려 했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남북은 기증물품 전달 준비를 위해 4년 만에 핫라인을 재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985년 5월, 남북적십자위원회는 사상 최초의 이산가족 상호방문과 수도에서 예술단의 공연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가졌다.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집중한 반면, 북측은 단체 여행을 우선시해 ‘축제’ 분위기를 부각시켰다.

통일부가 제공한 이 사진은 1985년 서울 서쪽 인천항에 도착한 남한의 수재민을 돕기 위해 북한이 기증한 물품을 보여준다.

통일부가 제공한 이 사진은 1985년 서울 서쪽 인천항에 도착한 남한의 수재민을 돕기 위해 북한이 기증한 물품을 보여준다.

양측은 몇 차례의 논의 끝에 이산가족과 예술팀별로 각각 50명으로 구성된 그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9월, 이산가족들은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고향을 방문했다. 서울과 평양에서도 미술전이 열렸다.

김웅희 전 남북대화실장은 기자들에게 “버마 폭격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북한은 방어 태세에서 남측에 대화를 제의해 국세를 반전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

2022년 5월 기밀해제 문서가 처음 공개된 이후 통일부는 이번을 포함해 5차례에 걸쳐 해당 파일을 공개했다.

해당 파일은 1981년 12월부터 1987년 5월까지의 1693쪽 분량의 문서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지난 남북회담과 관련해 30년 이상 전의 문건 공개에 관한 국방부 규정에 따라 기밀해제됐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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